가을하늘 공활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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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하늘 공활한데
![IMG_8840.JPG](https://cdn.steemitimages.com/DQmQ6sZnqYo8rtni6RL8bkzahUcscWnFroSP3GxEWyHC8gs/IMG_8840.JPG)

어제저녁엔 피아노 앞에 앉아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정말 졸릴 땐 하품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졸음의 양과 비례해 눈물이 나온다. 같이 합주하는 사람들은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며 웃었고, 나도 어떻게든 눈물을 멈추고 싶어서(잠을 깨고 싶어서) 울면서 웃었다.

가방 속에 있는 휴대폰을 잠깐 꺼냈을 때,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핑계로 합주실을 나와 하루 중 가장 기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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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가 친구의 자리를 대신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런 나에게도 아직 남아있는 사람이 몇 있다. 이 동생은 중학생 때 처음 알게 됐으니,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되었다. 스무 살 전까지는 함께 동네를 누비며 놀았는데, 음악을 핑계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자연스레라곤 했지만, 정말 자연스레 멀어진 것인지, 내가 일방적으로 거리를 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아마도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많은 사람을 남겨두고, 또 가끔은 등지고 살아왔다. 그런 내 옆에 지금까지 그 동생이 있는 것은 오로지 동생의 노력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늘 바빴고, 그래서 동생과 함께할 시간이 없었다. 동생을 만나면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과거에 얽매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동생에게는 상처가 됐을 것이다.

동생이 군대 가던 날, 면회 간다는 허울뿐인 말만 남기고, 전역 때까지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학교생활이 바쁘다는 이유였다. 그때 나는 합주 중이라는 이유로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못 받았(혹은 피했)다. 심지어는 휴가 나온 동생을 학교까지 불러 맛없는 밥을 먹이곤 했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보니, 동생이 사는 곳이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동생은 무척 좋아했지만, 2년 동안 우리가 동네에서 만난 횟수는 열 번도 되지 않는다. 동생에게선 종종 전화가 왔지만 그때마다 나는 뭔가 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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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지막 연락은 동생의 "그럼 언제 가면 볼 수 있어?"라는 질문이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걸려온 전화를 받고선 그런 미안함을 드러낼 새도 없이, 반가운 마음이 왈칵 들었다. 

최근 다른 곳으로 이사한 동생은 내가 사는 동네(동생에겐 전에 살던 동네)에 일이 있어 들렀다고 했다. 나는 그때 강남에 있었다.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동생을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동생은 요즘도 바쁘냐고 물었고, 나는 요즘은 정말 바쁘기 때문에 요즘은 정말 바쁘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보자는 말로 전화는 끊어졌다.

전화를 끊고, 다시 합주실에 들어가 합주를 시작했다. 동생과의 전화가 계속 맴돌았다. 생각해보니 요즘도 바쁘냐는 말은 질문이 아니라 서운함의 표시였던 것 같다.

긴 합주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은 공허했다. 몸이 피곤해 당장 머리를 기대고 싶었지만, 돌아가선 할 일이 있었다. 문득 외로워졌고, 동생이 보고 싶어졌다.

이미 집에 돌아간 동생에게 다시 오라고, 맥주 마시자고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면서, 이런 떼를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에게 온 답장은 오늘은 힘들다는 말이었다. 동생의 거절이 낯설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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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선 동생에겐 연락 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 '언제나'라는 단어는 생략했다. 동생은 미리 연락하고 왔어야 했는데, 그냥 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연락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말했고, 동생은 자주 연락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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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열 시에 합주가 있었다. 다행히 합주 장소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손을 풀고 갈 수 있었다. 오늘 합주곡은 웬만큼 연습이 되어 있어, 간만에 곡 연습 대신 손을 풀 수 있었다. 

연주할 곡의 스케일을 치면서 알게 되었다. 내 삶이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를... 간단한 음계 하나 제대로 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간의 연습이 얼마나 의미 없고 부질없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사상누각이다.

모든 상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눈앞의 건반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연습 내내 오늘 끝내야 할 일, 이따 가야 하는 곳, 정리해야 할 것들이 떠올라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결국 손 풀기를 포기하고, 곡을 의미 없이 두어 번 쳤다.

내가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이틀 새엔 공연이 세 개 추가됐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금방 한계를 넘어버릴 것 같다. 비는 오고, 진짜 동생 만나서 맥주 마시고 싶은데... 할 일은 많고, 손에 잡히진 않고... 

그래도 오늘 포스트잇엔 '스팀잇에 글쓰기'가 적혀 있었다. 다행히 오늘 할 일 하나는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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