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몰랐던, 동사의 맛

View this thread on: d.buzz | hive.blog | peakd.com | ecency.com
·@applepost·
0.000 HBD
지금껏 몰랐던, 동사의 맛
<html>
<p><br></p>
<p>글을 잘 써보겠다고 발버둥 칠 때마다 내 발목을 잡는 것은 어휘력이다. 쓰면 쓸수록 어휘력의 한계를 느낀다. 내가 지닌 낱말 그릇이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처음 느꼈을 때는, 읽기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다 점점, 적절하면서도 풍부한 어휘로 쓴 글이 마음 깊숙한 곳에 울림을 남긴다는 걸 알게 됐다. 글을 읽을 때 뜻을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앞뒤 문맥으로 적당히 파악하고 지나치는 습관도 조금씩 고쳤다.&nbsp;</p>
<p>자연스레 사전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사전으로 하나씩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다 보니, 그동안 내가 뜻을 명확히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는 걸 알았다. 또 한 단어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도 많았다. 최근 나는 글을 읽다가 이러한 단어들을 검색했다. 속절없다, 지켜보다, 흘러가다, 건네주다, 쫓다, 좇다, 아짐찮다, 아퀴. 이들 단어 중 ‘아짐찮다’와 ‘아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nbsp;</p>
<p><br></p>
<blockquote>아짐찮다 (형용사) &nbsp;&nbsp;1.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nbsp;2.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nbsp;&nbsp;</blockquote>
<blockquote>아퀴 (명사) &nbsp;&nbsp;1. 일을 마무르는 끝매듭. &nbsp;2. 일이나 정황 따위가 빈틈없이 들어맞음을 이르는 말. &nbsp;&nbsp;&nbsp;</blockquote>
<p><br></p>
<p>네이버 사전 앱으로 찾아 정리한 내용이다. 혹시 몰라 위 단어들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찾아봤다. ‘아퀴’는 위와 같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었지만, ‘아짐찮다’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지 단어 검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사전 앱으로 ‘아짐찮다’를 찾아봤는데 ‘‘안심찮다’의 방언’이라는 게 아닌가. 다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안심찮다’를 찾아보았다.&nbsp;</p>
<p><br></p>
<blockquote>안심찮다 (형용사) &nbsp;&nbsp;1. 남에게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 &nbsp;2. 안심이 되지 아니하고 걱정스럽다. &nbsp;&nbsp;</blockquote>
<p><br></p>
<p>네이버 사전 앱에서 다시 ‘아짐찮다’를 찾아보니, 오픈사전에 한 이용자가 작성한 뜻풀이였다. 어찌됐든 ‘아짐찮다’가 ‘안심찮다’의 방언인데, 내가 파악한 바대로라면 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nbsp;</p>
<p>이쯤 되니 마음이 복잡하다. 모국어로 글을 좀 써보겠다는데, 복잡한 게 왜 이리 많은지. 어쨌든 즐겁게 글을 쓰기로 한 마당에 더는 주춤하기도 싫어 좀 더 적극적으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해 보기로 했고 그 와중에 전문 교정자 김정선이 쓴 책 &lt;동사의 맛&gt;(도서출판 유유)을 만났다. 우리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를 익힐 수 있는 책이다.</p>
<p><br></p>
<p><img src="https://s14.postimg.org/ovw6knd4h/image.jpg" width="307" height="450"/></p>
<p><br></p>
<blockquote>우리말에서 형용사와 함께 이른바 용언에 해당하는 동사는 음식으로 치면 육수나 양념에 해당한다. 제 몸을 풀어 헤쳐 문장 전체에 스며들어서 글맛을 내기 때문이다. 육수나 양념과 마찬가지로 잘 쓰면 감칠맛까지 낼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맛은커녕 허기를 채우기도 어려워진다. 육수에 견준 김에 한 발 더 나아가자면, 다양한 육수와 양념이 화학조미료에 밀려나듯이 한자어에 ‘-하다’나 ‘-되다’를 붙여 쓰거나 대표되는 동사 하나로 한통쳐 쓰면서 멀쩡한 우리말 동사들이 때 이르게 죽은말 취급을 받고 있다. ‘그르치다’를 써도 될 때에도 굳이 ‘실패하다’를 쓰고, ‘견주다’, ‘비기다’보다 ‘비교하다’, ‘비하다’를 더 자주 쓰고, ‘가시다’, ‘부시다’를 ‘씻다’로 한통치는 식이다.</blockquote>
<blockquote>어디 그뿐인가. 우리말 관련 책에서도, 음식으로 치면 주재료에 해당하는 명사에 밀려 동사는 늘 찬밥 신세다. 그러다보니 제 몸을 풀어 헤친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동사는 활용형이 다양한데도 마땅히 찾아 확인할 곳도 없다. 어떤 건 도대체 기본형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사전에마저 한두 가지 활용형 말고는 달리 밝혀 둔 게 없다. 문제는 이런 건 누구한테 묻기도 뭣하다는 것이다. ‘밥이 눌기 전에 불을 꺼라’라거나 ‘언젠가 크게 데일 날이 올 거야’, ‘목메여 울다’, ‘체중이 분 뒤로 울해졌다’, ‘바쁘면 얼굴만 비추고 가’, ‘설레이는 마음’, ‘에둘러 가다’, ‘우울할 땐 볕을 쬐여라’, ‘일에 치어 산다’라고 쓰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 누구한테 묻고 어디에서 확인한단 말인가(모두 잘못된 표현이다). &nbsp;&nbsp;(10p)</blockquote>
<p><br></p>
<p>머리말을 짧게 인용하고 싶었는데 너무나 주옥같은 말이라 좀 더 길게 인용했다. 김정선 교정자는 “오랜 시간 교정지와 씨름하면서 우리말 동사만 다루고도 제법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한 권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lt;동사의 맛&gt;을 썼다.&nbsp;</p>
<p>책은 1,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가려 쓰면 글맛 나는 동사’, 2부는 ‘톺아보면 감칠맛 나는 동사’다. 말 그대로 1부에서는 가려 쓰면 글맛 나는 동사를, 2부에서는 톺아보면 감칠맛 나는 동사를 다양한 예와 한 남자와 여자의 사연으로 풀었다. 아하 그렇구나, 하며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을 인용해 본다. &nbsp;&nbsp;&nbsp;</p>
<p><br></p>
<blockquote>나누다 / 노느다</blockquote>
<blockquote>‘나누다’는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거나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해 분류하거나 말이나 의견을 주고받거나 음식을 함께 먹을 때 쓴다. 반면 ‘노느다’는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눌 때만 쓴다. ‘나누다’는 ‘나누어(눠), 나누니, 나누는, 나눈, 나눌, 나누었(눴)다’로 ‘노느다’는 ‘노나, 노느니, 노느는, 노는, 노늘, 노났다’로 쓴다. (69p) &nbsp;&nbsp;</blockquote>
<p><br></p>
<blockquote>뻗대다 / 삐대다 &nbsp;&nbsp;</blockquote>
<blockquote>고집스럽게 버티는 건 뻗대는 것이고, 눌어붙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삐대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다. 대학 때 학생 운동 조직에 몸담았던 친구가 한동안 내 방에서 지낸 적이 있다. “이렇게 늘 삐대서 어쩌냐.” 하고 친구는 미안해했지만 정작 내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이 청와대 근처에 있었던 데다 그때는 동네 곳곳에 의경 초소가 서 있었던지라 밤마다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번은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기에 나가 봤더니 친구 녀석이 불심검문에 걸려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외려 친구는 동네 주민을 상대로 집 앞에서 불심검문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뻗대는 것이었다. (137p) &nbsp;&nbsp;</blockquote>
<p><br></p>
<p>책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리말을 가벼이 여겼는지 알 수 있었다. 태어나 배운 말이니 굳이 갈고닦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지 부끄러웠다.</p>
<p>책은 지난해 말부터 읽었다. 원래 여러 권의 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읽지만 &lt;동사의 맛&gt;은 유난히 오래 붙들고 있었다. 책이 다루는 동사 중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어 읽는 속도가 더뎠다.&nbsp;</p>
<p>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 이 책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행히도 책 앞부분에 색인이 있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몇 번이고 책장을 들춰 보기 좋다.</p>
<p>말이나 글이 한 사람을 이루는 큰 부분인지, 이제 내 옆에 없는 사람들의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더 깊이 새겨진다. 앞서 ‘나누다/노느다’ 부분을 인용했다. ‘노느다’란 말을 처음 들은 줄 알았는데, 활용형을 보고 그게 아님을 알았다. ‘노느다’는 어렸을 적부터 익숙하게 들었던 말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노나 먹어.”란 말을 자주 하셨다. 용돈을 쥐여 주시며 과자 사서 친구들이랑 노나 먹으라고, 장떡이나 전 같은 걸 내주시며 동생들이랑 노나 먹으라고 하셨다.</p>
<p>“하나콤 노나 먹어.” 하는 할머니의 얇고 작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자꾸 맴돈다.</p>
<p><br></p>
</html>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