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곧 마음
kr-pen·@applepost·
0.000 HBD말 곧 마음
<html> <p><br></p> <p><strong>1. 광주로 가는 기차에서 </strong> </p> <p>금요일 아침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저녁이 지나 다시 돌아오는 기차를 예매해 두고. 가방 안에 넣어 간 책은 이태준의 <문장강화>다. 범우사에서 1999년 3쇄로 찍은 문고본이다. 책등과 책등에서 가까운 부분은 아주 옅은 미색으로 바랬지만, 앞표지 오른쪽 부분, 뒤표지 왼쪽 부분에 샛노란 색이 남아 있다. 색이 발한 모양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책에 적힌 ‘2천 원’이라는 정가가 20년이란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보여준다. </p> <p>덜컹이는 기차 안에서 언젠가 2천 원이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언제 이 책을 손에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책을 읽고 싶었던 마음만은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른다. 어디선가 글을 잘 쓰려면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감춰져 있을 줄 알았는데, 책이 가르쳐 주는 문장작법은 그리 유용하지 않았다. 어쨌든 작고 가벼워 한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언제부터는 책장 한쪽에 마치 없는 것처럼 두어 애꿎은 색만 바랬다.</p> <p>바뀐 계절을 기차 창밖 풍경으로 실감하곤 한다. 지난 2월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봤던 황량한 겨울나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록빛을 했다. 물과 들판을 지나 산이, 또 집들이 펼쳐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즐거웠다. 저 집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루를 시작했을까, 평생 단 한 번의 인연도 닿지 않을 사람들을 상상하는 건,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p> <p>창밖을 바라보다 말고 <문장강화>를 꺼냈다. “무슨 책이에요?” 같이 가는 친구가 물었다. “글 잘 쓰는 법 알려주는 책.” 내 이야기에 친구는 웃었다. 나도 웃었다. 1940년에 세상에 처음 나온 이 책을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꺼내 들고는, 글쓰기의 비책 같은 걸 얻고자 한 건 아니었다. 이태준이라는, 좋아했던 작가의 글을 읽고 싶었다.</p> <p> </p> <blockquote>글짓기가 아니라 말짓기라는 데 더욱 선명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마음이요 생각이요 감정이다.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 가까운 것은 글보다 말이다. “글 곧 말”이라는 글에 입각한 문장관은 구식이다. “말 곧 마음”이라는 말에 입각해 최단거리에서 표현을 계획해야 할 것이다. 26p </blockquote> <blockquote>아무리 보수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도 생활 자체가 무한한 새날을 통과해나가는, 그 궤도에서 역행하지는 못한다. 어떤 평범한 생활자이든 불가불 새것의 표현이 나날이 필요해지고 만다. 27p </blockquote> <p><br></p> <p>글을 잘 쓰고 싶었던 어느 시절의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을 구절이다. 수십 번의 계절이 바뀌고 잘 쓰고 싶단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보다 내가 누군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내게 주어진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내가 구축해 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말 곧 마음”, 마음으로 글을 쓰고 “무수한 새날을 통과해나가”며 글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 </p> <p><br></p> <p><br></p> <p><strong>2. 신선하고 다정다감한 생활</strong> </p> <p><br></p> <blockquote>여행처럼 신선하고 여행처럼 다정다감한 생활은 없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새것들이다. 새것들이니 호기심이 일어나고 호기심이 있이 보니 무슨 감상이고 떠오른다. 이 객지에서 얻은 감상을 쓰는 것이 기행문이다.</blockquote> <blockquote>기행문에는 첫째, 떠나는 즐거움이 나와야 한다. 77p </blockquote> <p><br></p> <p>여행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 주위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여행처럼 신선하고 여행처럼 다정다감한 생활은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잠깐이라도 나를 둘러싼 관계와 책임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으니까.</p> <p>내게 떠나는 즐거움은 책을 고르는 일에서 시작한다. 사실 떠나기 전 책을 고르는 일이 가장 즐겁다. 책장 앞에서 서성이며 조금의 설렘을 간직한 채 함께할 책을 고른다. 대체로 작고 가벼운 것으로, 읽었던 책 중에서 고른다. 목요일 밤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고르고는 꽤나 흡족했다. 깃털이 달린 만년필로 뭔가를 쓰는 손의 표지 그림이 마음을 붙잡았다.</p> <p>“어제보다 덥대요. 얇게 입으삼.” 금요일 아침 일찍, 같이 가는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직장 동료였던 친구는 나보다 예닐곱 살 어리다. 친구는 내게 존댓말과 반말을 적당히 섞어 쓰는데, 그 말씨가 좋다. </p> <p><br></p> <blockquote>둘째, 노정이 보여져야 한다. 79p </blockquote> <p><br></p> <p>광주송정역에서 내렸다. 역 밖으로 나오자 여름이란 존재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올해 들어 처음 느끼는 더위였다. 지하철을 타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했다. 전당 공사가 한창일 때 한 번 와서 보고는 개관 이후로 와 보지 않았다. 전당은 생각보다 컸지만, 건물이 지하로 펼쳐져 지상에서는 그 크기를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옛 전남도청사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일부로 활용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아시아’라는 부분에서 꽤나 의아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인권과 평화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일과 ‘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을 잇는 일은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시아’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콘텐츠로 이어갈지 궁금했던 것이다. </p> <p>전당에서는 여러 전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 <Parking Chance>, <아시아의 타투>를 봤다.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 전에서는 “베트남전이 확대되던 60년대 초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80년대 말까지 전세계 정치사회적 격변의 시대에 응답한 회화” 작업들을 볼 수 있었다. 작품을 전시한 가벽은 보통 전시에서처럼 흰색이 아니었다.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이 비쳤다. 친구가 우리를 안내해 주던 도슨트에게 가벽을 이런 식으로 만든 이유에 대해 물었다.</p> <p>“비극적인 현대사와 우리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해요.” </p> <p>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림을 바라보는 일이 더 힘겨웠다. 5.18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있었다. 도슨트의 발걸음에 맞춰 금방 지나치고 말았지만, 어쩐지 내 마음은 한 그림 앞에 오래 머물렀다. 1980년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부끄러움, 미안함 때문에 시위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시위대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 그림들을 발표하지 못했다. </p> <p><br></p> <blockquote>셋째, 객창감(客窓感)과 지방색이 나와야 한다. 82p </blockquote> <p><br></p> <p>전당 주변을 걸었다. 둥치 큰 나무와 세월이 느껴지는 건물들. 오래된 도시의 정취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초등학교 교정에는 키 큰 히말라야시다가 몇 그루나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슬기로운 서석 어린이’. 교문 바로 위 아치형 구조에 교훈처럼 보이는 문장이 보였다. 그리고 한쪽 벽을 따라 걸린 노란 바탕의 현수막에는 ‘잊지 않을게요 함께 할게요’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생소한 풍경이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그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없었다. </p> <p>천천히 걷다 작은 카페에 들어섰다. ‘무등산 핸드로스팅’이라는 멋진 이름의 카페였다. 친구는 코스타리카를, 나는 무등산 로스팅을 골랐다. 커피에 무등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정겨웠다. 클래식 라디오 방송이 흐르는 좁은 카페에서 마음 놓고 무등산 로스팅 커피 한 잔에 집중했다. 역류성 식도염 증세가 나아지며 커피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여전히 마시고 싶을 때마다 마실 순 없기에, 한 잔 마실 때 집중해서 마신다. 향과 맛을 음미하며 마시면 느긋한 한 모금의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무등산이란 이름의 커피는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신 맛이 튀지도, 쓴 맛이 사로잡지도 않았다.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무등산을 한 모금의 커피에 간직했다. </p> <p><br></p> <blockquote>넷째, 그림이나 노래를 넣어도 좋다. 85p</blockquote> <blockquote>그러나 노래나, 그림에 상당한 실력이 없어 본문에 손색이 될 만한 정도면 차라리 단념하는 것이 현명하다. 91p </blockquote> <p><br></p> <p>그림과 노래를 단념하고 사진 몇 장으로 여행의 감회를 새롭게 기록해보려 한다. 광주서석초등학교, 그리고 무등산 핸드로스팅 카페다. </p> <p><br></p> <p><img src="https://s7.postimg.cc/kirm8pqyz/image.jpg" width="816" height="612"/></p> <p><br></p> <p><img src="https://s7.postimg.cc/lxt6xgumz/image.jpg" width="816" height="612"/></p> <p><br></p> <blockquote>다섯째, 고증을 일삼지 말 것이다. 91p </blockquote> <p><br></p> <p>안타깝게도 고증을 일삼을 만큼의 지식이 내겐 없다. 다행이라고 여기며 짧은 기행문을 마친다. 일상을 더 자주 기록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그만큼 내 일상은 단조롭다. 신선하고 다정다감한 생활을, 그러니까 여행을 더 자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내게는 책장에서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을 발견하는 게 더할 나위 없는 여행이라는 걸 깨닫는다. 책장에서 신선하고 다정다감한 생활을 지속했으면 한다. </p> <p>광주로 향하는 길은 즐거웠다. 돌아오는 길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봐선, 여행은 떠나는 일 그 자체로 신선하고 다정다감한 일인가 보다. 광주로 가는 기차에서 나는 “말 곧 마음”이란 말을 여러 번 새겼다. </p> <p><br></p> </html>
👍 plop-into-milk, kunastory, jamjamfood, kyunga, outis410, kimthewriter, sleeprince, eversloth, yellocat, ab7b13, matsash, skan, qrwerq, roundyround, bookkeeper, asbear, feyee95, sjchoi, dayoung, extrashin, julianpark, hrabiamaurycy, leesol, agawolf, bree1042, lager68, stylegold, sadmt, chaelinj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