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법성게⟫ 이야기 #3 "증지소지비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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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지혜라만 알 수 있는 것일 뿐, 다른 차원으로는 불가능합니다. # 證智所知非餘境 증지<sup>證智</sup>. 오랫동안 우리가 매달려왔던 지혜란 말에 '증거'라 고 할 때 쓰는 '증'이란 수식이 붙었다. 그렇다면 그게 없는 보통 '지혜'도 있다는 말인가. 표현하기 쉽게 우리는 **지식**과 **지혜**를 구분해서 써 왔다. 그러니까 지식<sub>知</sup>은 여러가지 경로로 습득한 정보이고, 지혜<sup>智</sup>는 본인이 스스로 터득한, 어떤 깊이가 있는 것이라고 구분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는 글자를 구분해서 썼다. 하지만 정작 부처님이 살았던 인도에는 이런 명확한 구분이 없다. --- 같은것 을 알았는데, 스스로 알게 된 건 지혜이고, 습득을 통한 건 지식이라고들 여긴다. 선종에서는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되면 이치를 깨달은 '해오<sup>解悟</sup>, 깨달은 이치를 스스로 확인해서 체득하는 '증오<sup>證悟</sup>'라고 한다. '깨달음'과 '깨침'이 다른 것이 라고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 특이한 구분법도 있더라만. --- 진리의 세계를 봤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우리 세상을 무대로 벌어진다. '파랑새'와도 다를바가 없다. 무엇인가를 찾겠다고 어딘가에서 헤메다 찾지 못하고 돌아오니까 그게 출발점에 있더라고 다들 말한다. 그래도 직접 보고 온 것과는 다르니 갖다오는 것은 좋은데, 그 진리에 세계에서 계속 살면 그건 '구도'라기 보다는 '도피'쪽에 가깝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피 또한 자유니 가라마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게 우리가 찾는 답이 아닐 뿐더러 가장 좋은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부처의 지혜'가 아니라 왜 '보살의 지혜'라고 했을까. 또 왜 증지를 보살의 지혜라고 번역했을까. '' ⟪화엄경⟫을 강의하는 이는 부처가 아니라 보살이다. 우리는 대개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전의 단계로 부처보다 낮은 존재라고 여기지만, 화엄경이란 철학에 대한 셜명을 하는 이는 비로자나란 부처님이다. 비로자나불은 몸이 없다. 진리 그대로를 우리가 접근하기 좋게 인격화 해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설법을 하지만 육성으로 말하지 않으니까 귀로만 듣는 우리는 이를 들을수가 없다. --- 그러니 비로자나란 부처님을 찾아 떠날 필요는 없다. 아, 오해는 하지 말자. 뭐 그렇다고 비로자나불은 엄청 대단하고 우리가 미천해서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사이클 혹은 주파수가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일 뿐이다. 우리가 높은 주파수의 곤충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비로자나란 부처님은 사실 종교적으로 진리가 상징화 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진리의 세계에 대한 설명은 모두 보살들이 대신한다. 그래서 보살들을 비롯해서 등장 인물이 수없이 많다. 그 수많은 인물들은 우리가 그 스토리에 몰입할 때만 생겨나고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 그들이 우주공간 어디엔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UHD수준의 고화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이 그 티비화면 뒤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에가 의미를 부여할 때 존재하고, 신경을 끄면 모두 가상의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 또한 동시에 우리 각자의 마음상태가 **관세음보살**이 되기도 하고 **보현보살**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수없는 관세음보살, 수많은 보현보살이 동일한 시공간에 중첩으로 존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책읽기를 멈추었을 때 우리는 생각 속에서 그 주인공들도 책과 함께 떠나보내야 한다. 게임을 하다가 게임의 화려한 능력의 주인공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게임이 끝난 뒤 현실로 그 캐릭터를 데리고 나올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게임속 캐릭터와 우리의 실재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실재하기 때문이다. --- 드라마나 소설을 보며 우리가 그 인물들의 역사성을 ’구하지 않는 것처럼, 대승불교 경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진리의 매개체 혹은 그 자체로 상징이다. 그래서 대승경전을 읽는 사람은그 정보를 알기 위한 분석력과 이해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스토리의 감성적인 흐름에 공감하고 그 흐름에 몰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이야기가 주는 실질적인 메시지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보살의 지혜란 대승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 중 하나이다. 그들은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갖추고도 진리의 세계를 향해 떠나지 않는다. 아직도 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야 밝혀진 것이지만, 이 세계가 바로 바로 진리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떠나야 할 진리의 세계따위는 존재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보살의 지혜다. 그게 증지이며 그 지혜로 다르마의 세계에는 상대적인 둘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 사실 여기서 말하는 증지란 적어도 물리적인 대상으로 시작하고 있으므로 **앎의 지혜**냐 **체험의 지혜**냐를 따지는 증지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다르마의 존재가 상대적이므로 딱 잘라서 '생성과 소멸', '같음과 다름', '전체와 구분'이란 기준으로 나눌 수 없다는 사실, 그 것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므로 '보살의 지혜'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 물리적인 세계에서 **다르마-원자**는 이제 보살의 지혜가 없어도 원자현미경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증지'의 외연을 더 넓히거나 다른 경계에선 불가능 하다는 '비여경'이란 구절을 고쳐야 할 지도 모르겠다. 대개 진리는 변함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변하기 때문에, 변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진리다. 진리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변하지 않는 세계에 있는 진리따위는 없다. 지금 보고 듣는 것이 그대로 가상의 세계이며 진리의 세계이고 그 둘이 활발하게 섞여 돌아가는 차원인 걸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 그러나 보살의 지혜로 보는 것과 현미경으로 보는 것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미경을 통해서 볼 때는 관찰자와 대상이 있지만, 법성원융무이상을 보는데는 관찰자와 대상의 구분도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주객전도 <sup>主客顚倒</sup> 란 말은 여기서 온 것이다. 둘이 뒤엉켜서 구분이 안된다는 뜻이다. ⟪반야심경⟫의 '꿈과 현실이 뒤바뀐 세상'이란 의미의 전도몽상보다 높은 경지의 이야기인가 싶다. 반야심경은 꿈이 현실인줄 안다는 착각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법성게⟫는 꿈과 현실조차 다 섞어버리니까. 물론 지금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전혀 엉뚱한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