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던 버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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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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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던 버스 안에서
비오는 날 운전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빗물로 시야가 방해를 받고 열선이나 김서림방지를 작동시켜도 순간순간 뿌옇게 되는 앞유리나 사이드미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비가 왔고 와이퍼를 교체할 때가 되었는지 와이퍼가 작동할 때마다 말끔하게 닦이지 않는 앞유리가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오랜만에 바이브의 '이 나이 먹도록'을 틀었다.
비 오는 날 운전하기 불편한 건 어느새 잊어버리고 비와 차 안의 공간과 젖은 거리와 노래가 너무나 잘 어울려 오히려 집까지의 거리가 좀 더 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차 속에서 좋은 노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오래 전 여행지에서 들었던 노래가 떠올랐다.

인도에서 네팔로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허름한 버스를 타고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오랜 시간 가야 했다.
길 한 쪽은 천길만길 낭떠러지였고 한쪽에서는 히말라야산의 절경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었다.

경치는 기가 막힐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좋은 경치를 보고 감탄하는 것도 어느 정도이고 내내 구불거리는 길을, 그것도 한쪽이 절벽으로 된 길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자니 심리적으로 불안하기도 하고 몸도 많이 피곤했었다.
도중도중 잠깐씩 쉬어가기도 했는데 쉴 때면 버스에서 내려 몸을 쭉 펴기도 하고 그냥 이리저리 걸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잠깐 쉬려고 버스가 정차를 했을 때였다.

한 열 살쯤 됐을까.
인도아이인지 네팔아이인지 모를 웬 남자아이가 버스에 올라탔는데 타자마자 좁은 버스 통로에서 덤블링을 하면서 우선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는 통로 중간쯤에 서서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를 제외하고는 주로 유럽인 배낭여행객들로 가득찬 버스에서 사람들은 갑자기 시작된 노래에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레쌈삐리리~레쌈삐리리~..."

감동적인 목소리였다.
흔히들 말하는 천상의 목소리 같았다.
난 마이클잭슨이 어렸을 적 부른 Ben이라는 노래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청아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아이 얼굴이나 표정은 아이다운 천진난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거 같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달픈 인생이 일찌감치 시작된 것이 얼굴에 묻어난 것이리라.

구슬프면서도 맑은 목소리와 노래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그 노래를 사서 듣고 싶었지만 아이는 그냥 돈 몇 푼만 받고 버스에서 내렸다.
음원을 파는 게 아니니 당연했다.

거리의 악사라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난 그 날 들은 그 아이의 노래를 잊을 수가 없다.

너무나 강렬하게 마음을 흔들었던 노래라 이후 내내 그 노래를 사서 듣고 싶었는데 제목도 모르고 멜로디도 정확히 기억해내기 힘들어 사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네팔 레코드가게에서 혹시나 하고 산 테잎 속에 그 노래가 있었다.
버스 안에서 들었던 노래와는 느낌이 달랐지만 어찌나 그 노래가 좋던지 돌아와서는 한동안 계속 그 노래만 들었었다.
그 때는 한동안 꽤 애지중지했던 테잎이었는데 이제는 안타깝게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노래는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네팔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부르는 네팔민요였다.

이제는 오래전 기억에 불과하지만 아주 가끔씩 난 그 날 버스 안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줬던 그 아이를 떠올리곤 한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차 속에서도 문득 그 아이가 불러줬던 그 노래가 생각났다.

그리고 자칫 지루하고 밋밋한 기억으로만 남을 뻔했던 국경을 넘던 버스길을 좋은 추억으로 남겨준 그 아이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아이는 여전히 고단한 인생을 이어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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