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게임죄] 프레임 - 무시편
kr-game·@dev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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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시(無視) - [명사] 1.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2.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 <center>  </center> <center>**이런식의 비교는 큰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center> #### 1. 사실 게임이 무시당하는건 하루이틀문제는 아닙니다. 총기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유명한 게임인 GTA 시리즈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순간적으로 폭력을 참지 못하게 하는 피씨방 전원내리기등은 게임을 주체화 하여 멍에와 같은 프레임을 뒤집어 쒸웁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명사는 주체로 사용할 수 없기에 자연히 그 화살은 게임과 관련된 사람들, 즉 게임을 만드는자와 즐기는자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이 좀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일이 있습니다. 2004년 바다이야기 사태로 발발한 게임과 마약에 등호가 그어진 사건당시 게임 개발자였던 많은 사람들은 그 뉴스가 나온날 저녁 약속이라도 한듯 구로와 강남일대에서 호프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그 사건은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만' 않던 '게임은 사회악'이라는 명제를 명문화 했을뿐, 그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게임에 대한 적극적 무시는 존재해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의 잔재인 한국인은 게으르다는 정의를 기반한 식민주의 역사관으로 부터 출발한 새마을 운동은 돈이 되는 일이 아닌 모든 것을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인간성을 재정의하고 아주 깊은 문화적 전통을 가진 우리역사를 무시하고 모두의 인생을 돈과 사회의 노예로 묶어 버린것 같습니다. 어른들의 취미활동은 비지니스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변질되어 접대골프나 룸, 술자리등으로 제한되고 그마저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음성화된 도박장들이 반겨줍니다. 표암 강세황의 균와아집도에 바둑이 표현되듯 시서화와 놀이가 함께 가던 문화적 전통이 모두 사라진 지금, 우리는 즐기면서도 한편으로 결국 게임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애써 무시하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center>  </center> <center>**심지어 김홍도가 그림쟁이라 무시당했다고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center> #### 2. 결국 게임하는 사람이 무시당하는게 문제다. 많은 커뮤니티에서 한국 게임 개발자들에 대한 악의에 찬 발언들을 자주 접합니다. 저도 일정부분 공감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가슴아픈 기억도 많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결국 게임하는 사람이 당하는 무시입니다.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기대이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게임에 쉽게 '망겜'의 굴레를 씌우고 그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비아냥 거리거나 비웃는 행위를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마치 그러한 태도가 쿨하거나 게임을 잘아는 사람이면 응당 취해야 하는 것 마냥 다루어지기도 합니다. 유명한 디아블로3를 비아냥 거리는 '똥3'-수면제같은 멸칭이나, 스타크래프트2가 망했다거나, 오버워치가 망했다거나, 심지어 최근에는 배틀그라운드가 망한다거나 서든어택2가 망한것이 마치 게이머가 획득한 승리인것 처럼 다루는 모습에서 비판이나 비평 그 이상의 악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문화적 생산물을 대하는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적대적 태도는 무시인것은 다들 잘아실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제품에 대한 못본척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심리학에 능통하진 못하기에 확신할 순 없지만 마치 그들의 어조에서 게임을 좋은 게임, 나쁜 게임으로 구분하듯 나쁜 게임을 열심히 비판하고 자신이 하는 게임은 좋은게임이라고 열심히 항변하는듯한 인상을 숨길 수 없습니다. 결국 '나쁜 게임을 하는 게이머'를 적극적으로 무시해서 자신들은 '좋은 게임을 할줄 아는 좋은 게이머'라는 입장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center>  </center> <center>**좋은게임이라는 프레임에 성공적으로 갇힌듯 합니다.**</center> #### 3. 문학적, 문화적 감상 비평의 주관적 완성 2017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풍경소리'에는 절에 잠시 몸을 의탁하여 숙식을 해결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 주인공은 별 생각없이 풍경소리를 즐기며 그 절의 보살님들이 지어주는 밥을 맛있게 먹으며 과거를 회상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지냅니다. 그러다 평소에 지나다니며 본 궁금증을 입밖으로 꺼내어 주지스님에게 저 원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우주라고 대답합니다. 원을 보고 우주를 깨달은건 스님이겠지만 그 감상을 나눔으로 주인공도 깨달음에 다가설 기회를 얻을 수 있던것 같습니다. 고작 담벼락에 그려진 원을보고도 우주를 깨닫는 스님이 있는 반면 저는 발치에도 못미치는 인간이기에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하는 게임을 하면서도 이별의 아픔이나 성취의 기쁨, 배신의 상처나 슬픈 추억같이 뻔한 연출이 아니고서야 감동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비평은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역사있고 신뢰받는 비평가의 비평은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인정받게 되는것 같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단한번도 게임은 비평의 영역에서 다뤄지지 못한것 같습니다. 아마 그럴 자격이 있는 미디어라고 평가받은적 조차 단 한번도 없을지 모릅니다. 18년 2월 3일 분당밋업이 있었습니다. 주최하신 존경하는(진심입니다.) @lekang님께서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게임을 하나 준비하셨습니다. 서로를 거의 모르는 20명넘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고 아이디와 그 성향을 매치시키는 재기넘치는 게임이었습니다. 이미 준비되있던 익숙한 스포츠인 볼링조차 관심을 빼앗지 못할 정도로 참여하는 모두가 흥미로워했습니다. 게임에 참여하셨던 거의 모든 분들은 아마 게임이 끝나시고 20여명의 아이디가 친숙해지는 마법같은 경험을 하셨을걸로 생각합니다. 모두를 이어주고 따듯한 마음이 오가는 게임은, 설혹 그렇지 않고 좀 함량미달로 보일 게임일 지라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한번이라도 정당한 비평을 받을 기회를 줘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가 있다면, 서른 즈음에 같은 노래가 있다면, 장미의 이름으로 같은 소설이 있다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게임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center>  </center> <center>**모두가 쉽게 욕하는 게임도 누군가에겐 인생게임일 수 있을테니까요.**</center> 7대 게임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