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 부여 여행기] - 공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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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 부여 여행기 - 공주편 --- 안녕하세요 @eternalight 입니다. 스팀잇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어가네요. 저번 포스팅에 이어 오늘은 더 자세한 이야기로 공주편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 첫번째로 향한 곳은 마곡사입니다.  항상 여행을 하게되면 그 지역의 유명 고찰을 찾게 되는되요. 그 이유는 제가 불자라서가 아니라 고찰이 위치한 곳이 대부분 천해의 자연 경관을 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 찾아가는데 애를 먹었네요. 흡사 이니셜D의 타쿠미가 두부배달을 할 것 같은 와인딩 도로를 지나 마곡사에 도착합니다.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하여 7시반정도에 떨어지니 매표소 직원도 출근하지 않아 절 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라시대 때 창건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효종때 중건했다고 하니 역사가 깊은 절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 입구와 가까우니 경건한 마음으로 조용히 지나갑니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나 봅니다.  충남을 대표하는 사찰이라 하나 규모가 작아 보입니다. 창건 당시에는 30여칸의 대사찰이였으나 현재는 건물 몇채만 남아 있을 뿐이네요.   마곡사 오는 길이 고개가 많고 유난히 구비진 길이 많은 이유를 알게 됩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직접 심으신 향나무라고 합니다. 명성황후를 시해에 가담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탈옥한 뒤에 이곳으로 피신하여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 생활을 하셨답니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이곳을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과 아침부터 출발해 조금 지쳐있던 심신이 조금은 나아지는 기분입니다. 이곳에서부터 백범 선생님이 산책하시던 길이 이어집니다. 이곳만 보더라도 산책을 하기에 아주 좋을 코스라고 보여집니다. 짧은 코스로 잠시 들러갈까 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여행지로 출발합니다. --- 다음으로 둘러볼 곳은 공산성입니다. 산성이자 왕성인 이곳은 한성에서 천도하여 60여년의 짧은 기간 동안 웅진시대의 도성 역할을 한 곳입니다.  현재의 모습은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개축한 모습으로 백제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가 이곳으로 도망하여 한양의 반란군들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 하네요.  성을 오릅니다. 벌써부터 힘든 여정이 될 것만 같습니다.  조금 지나보니 학교안에 야구장이 보입니다. 야구부가 있는 학교인 것 같습니다. 그가 떠오르네요. 역시나 한국야구의 레전드 박찬호의 모교 공주중학교입니다.   공주시내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성벽을 보니 쉽사리 이곳을 공략하지는 못할 것 같네요.  왕궁터 추정지입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아 그냥 지나칠 뻔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급하게 수도를 옮기다 보니 큰 규모의 궁궐은 필요치 않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곳에서 다시 재정비하여 한강을 다시 회복하려 했을수도 있겠지요.  조금 지쳐가려 할 때 쯤 장수풍뎅이를 발견했습니다. 살아있는 놈은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네요.  금강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지금에서야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백제의 마지막엔 이곳에서 수천의 화살이 오갔을 것입니다. 백제 웅진시대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장소가 바로 공산성입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은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끝내 항복하고 맙니다. 망국의 마지막왕이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알려진 의자왕의 이미지는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삼천궁녀와 술과 음악에 빠져 나라를 등한시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후대의 문인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삼천이라는 숫자만 봐도 그 당시의 인구수나 궁궐터를 생각해봐더 터무니 없이 과장된 숫자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항전할 시점에 곁에 머문 두명의 장수가 있습니다. 한명은 흑치상지이고 다른이는 예식진입니다. 이 두명의 인물은 잘 알려지지 않다가 중국에서 묘지석이 발견되며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흑치상지는 삼국사기 열전(위대한 인물의 전기)에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함께 소개될 정도의 명장이였습니다. 흑치라는 독특한 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출신지에서 유래한 성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출신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흑치국에서 왔다하여 흑치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흑치 말 그대로 검은이빨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흑치국을 지금의 필리핀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즐겨먹는 과일 중의 하나를 먹으면 이빨이 검게 된다고 하는데요. 흑치상지가 실제 필리핀 출신이라면 백제가 동남아의 나라들과도 교류했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흑치상지는 660년 7월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높은 곳에 앉아 의자왕을 내려다 보며 술을 따르게 하는 모욕적인 일을 목격합니다. 이를 보고 성을 빠져나가 임존성으로 달려가 백제부흥운동을 이끕니다. 예식진은 웅진사람으로 3대에 걸쳐 좌평을 지낸 유력가문출신 입니다. 의자왕이 사비성을 두고 웅진성으로 옮겨 항전할 시기 함께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길고 긴 항전에서 예식진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왕을 모시고 항전을 계속해 나갈 것이냐 아니면 당에 항복하여 공을 세우고 당나라의 벼슬을 할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안타깝게도 예식진은 후자를 택하게 됩니다. 의자왕이 스스로 항복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예식진의 묘지석이 발견되며 역사는 다시 쓰여지게 됩니다. 예식진은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바치며 투항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묘지석은 백제의 땅이 아닌 중국에서 발견됩니다. 그 이유는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의 장수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당나라는 이민족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고 나라에 보탬이 되면 크게 치하하고 벼슬을 주었습니다. 많은 수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당으로 끌려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인물이 모두 당나라의 장수가 된 것을 두고 보면 민족과 나라를 배신한 반역자로 보는 것은 당연한 듯 합니다. 하지만 두사람이 당에서 보여준 행태는 달랐습니다. 예식진이 자신이 모시던 왕을 볼모로 삼아 바쳐 그 공으로 벼슬을 받아 당을 위해 살지만 흑치상지는 달랐습니다. 애초에 당나라에 건너간 이유가 달랐으니까요. 당에는 의자왕의 제1태자인 부여융이 있었습니다. 태자인 부여융과 함께 백제 유민들을 돌보며 백제부흥운동을 준비합니다. 당으로 건너간 흑치상지는 백제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한 군사들과 함께였습니다. 수많은 전투를 함께한 최강의 호흡을 자랑하는 군사였지요. 이들은 당의 지시로 변방을 돌며 당나라 주변국들을 토벌합니다. 백전무패의 신화의 장군이 됩니다. 끝내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당시 당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측천무후가 이민국들의 장수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반면 예식진은 천수를 다하고 당 조정의 배려로 고관대작들만이 묻히던 곳에 잠들게 됩니다. 발견된 묘지석만을 가지고 두인물을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침에 마곡사에서 김구선생님의 숨결을 느끼고 오니 흑치상지에 마음이 더 기우는 것 같습니다.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 항일운동을 펼치는 모습이 흑치상지의 그것과 닮아보입니다. 예식진은 그 반대인 을사오적을 떠오르게 하네요. 역사를 보는 시각에는 저마다의 차이가 있으니 각자가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새는 요새입니다. 성문에서 방향선택을 잘 한 것 같네요. 반대로 돌았다면 이곳을 오르게 됬을테니까요.  이곳에도 우물이 있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성안마을이라 불리던 곳이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며 칠갑옷이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발견된 갑옷에서는 정관19년이라는 글귀를 비롯해 많은 글자들이 발견되어 정확한 연대와 그 시대의 상황을 유추해 볼수 있다고 합니다. 칠갑옷에 대한 조사를 해보니 단순히 옻칠을 한 갑옷이 아닌 황칠을 한 갑옷으로 밝혀졌습니다. 황칠은 황칠나무에서 나온 수액을 채취하여 갑옷이나 금속에 바르게 되면 공기중에서 산화하여 황금색을 띈다고 하네요. 이 황칠나무는 한반도 서남해안에서만 나는 수종으로 황칠을 바른 갑옷을 당에 특산품으로 보낸 사례가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황칠나무가 서남해안의 고유종이고 그 채취량이 많지 않다 보니 당시에 중간관리들의 착취가 심하여 그것을 채취하는 농민들이 이를 못이겨 몰래 나무들을 잘라 지금은 거의 명맥이 끊어졌다 합니다. 황칠갑옷과 함께 마갑과 두자루의 칼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마갑에 딸린 금속 부속품들은 함께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부러 우물에 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같은 토층에서 불에 탄 기와와 각종 화살이 발견되었는데 백제의 것과 아닌 것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칠갑옷에 적힌 정관19년은 645년으로 아마도 백제 마지막시기에 공산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다시 오릅니다.   더 높은 곳에서 금강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적들이 쳐들어 오는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두시간에 조금 못미쳐 산성을 다 둘러 보았네요. 다시 한번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았다는 것을 깨닫고 여행 첫날 공산성부터 오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행에 지쳐 올랐다면 꾀나 힘들었을 것 같네요. 그렇다고 많이 힘든 코스는 아닙니다. 더 자세히 천천히 돌아 보신다면 두시간 반이면 충분할 듯 싶네요. 이제 공산성을 뒤로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 더운 날씨에 뜨거운 짬뽕으로 배를 채우고 송산리 고분군으로 향합니다. 여행중 먹었던 음식들은 번외편으로 다룰게요.  송산리 고분군은 초등학교때 방문한 이후로 두번째 방문입니다. 꾀 오랜 세월이 흘러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당시엔 송산리 고분군보다 무령왕릉으로만 알고 있었네요.  이곳은 고분이 아닙니다. 전시관이에요. 바로 들어가 보니 천국이 따로 없네요. 에어콘이 빵빵합니다. 안의 전시 내용은 아이들이 관람하기에 좋을 듯 보입니다.  날짜를 보니 초등학교때 갔던 날보다 뒤의 날짜였습니다. 그때 당시는 실제로 들어가 봤을 텐데 좀처럼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발굴도 졸속으로 했다던데 관리도 엉망이였을 것 같습니다.   멀리 공산성이 보입니다. 공주와 부여 모두 역사 유적지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높은 곳에 오르면 지나쳐 왔던 곳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선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유일하게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곳입니다. 1971년 배수로 작업 도중 발견되어 12시간 만에 졸속으로 발굴되었습니다. 발굴 당시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바람에 발굴을 서둘렀다지만 안타깝기가 그지 없네요. 형사사건 현장도 그렇게 두서없이 건들지는 않는데 말이죠. 그로 인해 유물들의 위치가 바뀌고 어떤 것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도 기록조차 해두지 않아 고분이 가진 수많은 정보들을 놓치게 됩니다. 무령왕의 탄생에는 비밀이 많습니다. 개로왕이라는 기록과 그의 동생인 곤지가 아버지라는 기록이 공존합니다.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입니다. 왕족이 성씨가 부여이니 부여사마이지요. 사마라는 이름을 얻게 된데는 그가 섬에서 태어나 지어졌다고 무령왕릉 지석에 나와있습니다. 곤지와 무령왕의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가는 도중 후쿠오카 북쪽의 각라도에서 태어납니다. 일본어로 섬은 시마라 불립니다. 최근 개봉한 하시마, 대마도는 쓰시마라고 불리지요. 욘사마의 사마도 극존칭이라 하던데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는 일본 아스카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아스카의 조상신으로 지금까지 모셔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일왕 아키히토가 무령왕의 후손이 자신들과 관련있다고 고백하고 실제로 무령왕릉을 참배한 적도 있다네요. 이는 백제가 삼국중에서 고구려 신라에 비해 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무령왕의 목관도 이를 뒷받침 해줍니다. 목관의 재료는 금송으로 전세계에서 일본에서만 자라는 고유종이라고 합니다. 곤지와 무령왕이 선진문물을 가져다 주어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목관의 재료인 금송을 받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무령왕릉은 백제시대에 발견된 왕릉중에 유일하게 전벽돌을 아치형으로 쌓은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이는 양나라 수도 남경에서 발견되는 왕릉의 형식과 동일한 것입니다. 당시 무령왕이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양나라와도 긴밀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즌 사례이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알려주는 증거겠지요. 당시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변방의 나라가 아닌 동아시아 전체를 누비고 다녔던 넓은 세계관을 지닌 나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이상으로 공주편을 마치겠습니다. 위의 내용은 제 짧은 지식과 함께 역사스페셜을 비롯한 역사프로그램들을 참조하였습니다. 혹시나 더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KBS 역사포털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http://history.kbs.co.kr/web) 가입만 하시면 다시보기는 무료입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편에는 부여편을 다루기 전에 번외편으로 여행지에서 먹은 음식들을 소개할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