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팀] 그대의 차가운 손 -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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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은, 그렇지만 아름다운 문체. 상처들, 겉과 속 이야기. 나는 진실을 믿고 보여주려 하는 사람, 껍데기나 껍질 속의 진실을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나는, 장운형이 애처로워하는, 장운형의 마음을 끌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인 셈이다. 겉만 스쳐 가는 관계가 무의미하다고 느끼며, 끈끈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충만하고 영원한 관계를 꿈꾼다. 나의 이상은 메마른 정신이 느껴지는 장운형의 조각과는 거리가 먼, 척척한 알맹이다. 그러나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상처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의 딱딱한 껍데기에 부딪혀 나의 마음도 어느덧 딱딱한 공허 속에 갇혀 버린 것일까. 극단적이지만 현실적인 소설 속 공허함이 기묘하게 내 마음 속 빈 곳을 위로했다. 그럴 때가 있었다. 남들이 공감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했을 때, 내가 공감하는 것에 남들이 공감하지 못했을 때. 내 속마음을 얘기하면,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할까 봐 속마음과 정반대의 말을 했던 어느 때. 나는 내가 남들과 다른,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며 나는 괜스레 내가 유별난 괴짜가 아님을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장운형이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였다. 나는 그 대목에서‘장운형이 남들이 믿는 것을 의심하고, 남들이 만족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게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면을 볼 줄 모르며, 타인의 약점을 끄집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작은 물줄기가 모여 거센 물살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나의 작은 의문은 차곡차곡 쌓여 폭력이라는 거대한 두 글자를 뇌리에 각인했다. 세상의 폭력들. 총기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피해자에게 배상해주기는커녕 피해자를 감옥에 가둔 군대. 잘린 손가락이나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 수치심을 느낄 정도의 잔혹한 시선과 말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행해지는, 자식을 공터로 내모는 자식 교육. 최소한의 자아존중감마저 무너뜨리는 아동 성폭력. 살찐 여성에게 가해지는 눈빛 학대. 여성을 성적 도구로 생각하는 남성들. 자신의 상처가 만든 날카로운 칼. 구애자들에게 뿜어내는 오만과 허영, 힘의 과시. 불신 사회에서의 고독. 재산을 사람 위에 올려놓는 익숙한 풍토. 소설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얼굴 없기에 더 무서운 그런 폭력들.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는 존재. H가 말한 대로 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질병일지도 모른다. H는 그 명제를 언급하며‘예기치 못했던 병을 오랫동안 앓다가 거리에 나오면, 이 사회라는 것이 건강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장운형의 스케치북은 H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 같았다. 그 스케치북에 담긴 인물들은 상냥한 폭력에 건강한 집단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스케치북에 나온 집단(가족, 친구, 연인)은 어딘가 뒤틀어진, 아픔과 혐오로 얼룩진 트라우마에 불과했다. 탈바가지, 뱀으로 묘사된 장운형의 부모도, 성폭행을 감행한 L의 새아버지도, 새아버지의 말만 믿은 L의 어머니도, E를 육손이라 놀렸던 E의 고향 사람들도, E의 여섯 번째 손 이야기를 듣고 E를 떠났던 남성들도, 아픈 껍데기를 낳는, 건강하지 못한 껍데기였다. 소설에서 ‘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손’의 상징성을 찾고자 몇 번이나 읽었던 부분을 곱씹으며 사색에 잠겨야 했다. 그 결과, 나는 ‘손’에서 실천의 의미를 읽을 수 없었다. 실천은 얼굴 뒤로 감춘 내면을 드러나게 하며, 감정을 분출하며, 무언가를 바꾸고 창조한다. 소설에서 ‘손’은 ‘얼굴’과 대립한다. 얼굴은 혀와 눈이 있어 정확한 말을 하지만, 손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만 손은 얼굴보다 진실을 잘 드러낸다. 말 없는 실천으로, 조각으로, 체온으로. 그렇다고 손이 긍정적인 ‘실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장운형은 어째 보면 얼굴보다 손이 교묘한 탈이라고 표현한다. 정지한 손은 얼굴보다 철저한 껍데기이며, 칼을 든 손은 섬뜩한 얼굴보다 위협적인 무기이다. 소설 속 E라는 인물은 다른 인물과 달리 ‘얼굴’이 부각되었다. 그녀는 장운형이 처음으로 얼굴을 뜨고 싶은 욕구를 느낀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는 간혹 데드마스크처럼 생기가 없는 얼굴을 하곤 했는데, 그 얼굴은 장운형이 표현하고 싶었던 비밀을 움켜쥔 손과 흡사했다. 장운형은 E의 얼굴을 뜨면, E의 감춰진 비밀을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장운형은 집요한 노력 끝에 E의 몸을 뜰 기회를 얻었지만, E의 손가락을 뜨기 위해서 꽉 움켜쥔 그녀의 주먹을 펴다가 E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고 만다. 그리고 E의 손에 감춰진 비밀, E가 받은 세상의 상처를 끝내 듣게 된다. E가 비밀을 드러내는 전후, 작업실은 살벌했다. E와 장운형은 자신의 몸을 둘러싼 껍데기를 벗을 때, 자신의 몸에, 그리고 서로의 몸에 상처를 냈다. 그러나 옥신각신 껍데기에서 서로를 번갈아가며 구출하면서 그들은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아픔에 공감했다. E는 말했다. “네가 날 꺼냈고……또 난 널 꺼낸 건가?”그리고 E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냥한 손길로 장운형의 오른팔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그날 밤 그들은 거짓된 섹스가 아닌 진짜 섹스를 했고, 껍데기로 둘러쌓인 세상에서 벗어나 행방불명되었다. 장운형은 2년 뒤, E와 함께 자신의 유고전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씁쓸하게도 그를 알아본 건 가족도 친구도 아닌 H뿐이었다. 장운형과 E가 지인들 곁을 떠나 행복한지 정확히는 알 수는 없으나 2년 동안이나 소식 없이 살아간 것으로 미루어 나는 그들이 껍데기에서 꺼내진 삶에 만족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소설은 나의 이상을 뒤틀지 않았다. 진심으로 향한 손길이, 손으로 향한 진심이 진실한 관계를 잉태했다. 세상의 폭력이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해도, 세상이 껍데기를 품은 껍데기 같아도, 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손이 있음을 믿는다. 결국, 나에게 필요한 건 이상을 실현할 용기와 실천이었음을 소설을 읽고 새삼스레 각성했다. 순간, 진실한 마음을 따뜻한 손에 담아 한 자 한 자 편지를 쓰고픈 사람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