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er
kr-psychology·@slowdive14·
0.000 HBDorder
요즘 일이 너무 많아져서 힘들다. 보통 종합심리평가 2개 지능빠진 정서 및 성격 평가 2개 신경인지장애 평가 2개 정도 해서 일주일에 6개 정도 검사해 왔다. 하루에 환자 심리평가를 한 번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실적 압박이 심해서 종합을 하나 더 추가했다. 월급의 3배 정도를 병원에 벌어다 주는 셈이다. 심리평가라는 게 이전에도 말했지만 굉장히 고가다. 이런 고가의 검사를 거부하기가 어려운 것은 환자나 보호자가 의사를 믿기 때문이다. 의사가 환자 심리평가가 필요하다는데 그걸 안 믿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 평가가 아무리 고가라 하더라도 의사가 하자고 하면 하게 될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내가 일이 하기 싫어서 그런지 과잉처방으로 의심되는 검사의 비중이 크다. 정신과 환자라고 해서 모두 심리평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사람도 있고 필요치 않은 사람도 있다. 필요치 않아 보이는 사람까지 평가를 하게 하는 것을 보면 과잉처방이 의심되지만, 내가 일이 하기 싫어서 그렇게 의심되는 것이지 꼭 필요한 검사일 것이다. 환자를 자주 본 것은 의사이니 의사가 나름의 이유로 내는 것일 테지. 과잉처방이 내 의심에만 국한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더한 문제는 심리평가 해석을 그 평가를 시행한 병원 임상심리전문가가 하지 않고 정신과 의사가 한다는 데 있다. 정신과 의사는 심리평가에 대해 잘 모른다. 일전에 영재발굴단에 나오는 정신과 의사가 지능검사의 결과에서 전체지능에 연관되는 점수를 말할 때 엉뚱한 부분을 자신감 있게 가리키는 것을 보면서 혼자 속으로 개탄했다. 해석을 정신과 의사가 어떤 식으로 하는지 본 적이 없다. 차트에 한두줄 짧게 적혀 있을 뿐이다. '심리검사 결과 설명' 이런 식으로. 뭘 어떻게 설명했다는 건지.. 40~50만 원에 달하는 종합심리평가를 시행하더라도 들인 돈에 비해 설명이 부실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심리평가의 해석을 병원 임상심리전문가가 할 수 없는 것은(이건 서울 소재 대학병원 포함해서 전국 정신과가 거의 대동소이하다) 의사와 심리학자 간의 팀 어프로치가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입장에서 볼 때 다른 직역은 자신의 오더를 받는 위치일 뿐이며 협력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아니다.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오더 받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병원 임상심리전문가는 그들 눈에 아마 심리검사 머신 정도로 보일 것이다. 평가 결과에 대해 궁금할 법도 한데 물어보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지금 병원도 그랬고 이전에 수련 받았던 병원도 그랬다. 병원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 얘기 들어봐도 그렇다. 궁금하지도 않은 심리검사의 '오더'를 왜 낼까? 이건 뭐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계속 모를 이야기인바 굳이 적지 않는다. 심리평가 보고서라는 것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인데, 수익 창출에 급급한 병원장은 그런 것에 대한 이해 의지는 1도 있을 리가 없고, 월급 받는 닥터들에게 검사 좀 많이 내라고 한 번씩 우회적으로(혹은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에 심리검사 오더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보고서 퀄을 낮추게 된다. 초자아의 엄중한 눈이 있기 때문에 종합심리평가에서 단 한 번도 카피 앤 페이스트 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솔직히 이렇게 검사 홍수가 나버리면 대충해서 내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다. 오더를 낸 의사는 있지만 이 보고서를 읽을 의사는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임상심리전문가라고 해서 다 심리치료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초임 전문가 중에 심리치료 다시 배우는 사람도 많고, 임상심리전문가 중에 연식이 많이 됐어도 병원에만 있다 보니 심리치료 못 하는(or 필요를 못 느껴 안 하는) 사람도 많다. 이건 정신과 의사에게도 해당된다. 정신과 의사는 약물치료 잘한다. 약물치료는 정신과 의사가 최고 전문가다. 수련 과정에서 약물치료 위주로 배우기 때문이다. 그 수련 과정의 일부(저널이나 북 리딩)에 나도 참여한 바 있고 바로 옆에서 지켜보니 모를 수가 없다. 심리치료만큼이나 약물치료도 굉장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예술적인 영역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라고 해서 심리치료(정신과 의사는 꼭 '정신치료'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잘 하나? 국내 정신과 셋팅 및 수가 체계 자체가 약물치료에 팔할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돼 있는 상황에서 정말 심리치료를 제대로 공부하고자 애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심리치료 잘 하는 사람 드물 수밖에 없다. 정신과 의사가 뇌와 바이올로지와 정신약리학에 전문가일 수는 있어도 심리치료의 전문가는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엑스퍼트가 아닌데 심리평가의 결과를 임상심리전문가가 해석할 수 없게 암묵적으로 해놓은 것은 오만이 아닐지. 동료로 여긴다면 해석을 임상심리전문가에게 맡기고 자문을 구하는 게 맞지 않을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결론은 정신과 의사(뿐만 아니라 동네 심리상담 센터들)가 별 설명도 없이 고가의 종합심리평가를 해보자고 할 때는 그 이유를 따져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가 후에 심리평가 보고서를 받아서(아마 보고서 받는데도 따로 몇만 원 내라고 하겠지만)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좋다. 흰 가운이 일종의 권력이라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일부 사설 심리상담체인에서 흰 가운 입히나?) 요즘에는 가운을 벗고 평가할 때가 많다. 병원을 나가고 싶은데 딸린 식솔이 있어서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