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역사: 자기 땅에서 추방 당한 자들 - 프란츠 파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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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HBD현대 역사: 자기 땅에서 추방 당한 자들 - 프란츠 파농
 **현대 역사: 자기 땅에서 추방 당한 자들 - 프란츠 파농** 20세기 중엽,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이 세계가 동서 냉전의 양대 체제로 재편될 때, 이 흐름에 제 운명이 좌우되면서도 이를 거부하고 또한 극복하고자 한 거센 저항이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을 '식민'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이 제3세계(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그래서 '탈식민'이라는 중대한 화두를 집어들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츠 파농이 1961년의 오늘, 12월 6일에 사망했다. 파농은 1925년에 카리브해 앤탤러스 제도에 있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파농이나 그의 부모가 일찌감치 마르티니크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윗 세대는 모두 노예였다. 마르티니크는 1635년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1946년 이후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이 된다. 레지옹이란 제국의 한 주(州)를 말한다. 예컨대 남미 브라질 위쪽에도 마르티니크와 비슷한 운명을 살아온 지역이 있는데 '프랑스령 기아나'라고 부른다. 그 옆에 독립국가인 수리남이 있는데 이는 과거에 '네덜란드령 기아나'라고 불렸다. 이 식민지 주의 출생자들이 제국의 큰 도시에 진출하여 살거나 혹은 그쪽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 일이 많다.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네덜란드의 히딩크 전 감독 애인 엘리자베스가 바로 이 수리남 출신이었고 1962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축구 스타 루드 굴리트는 수리남 출신의 아버지와 네덜란드 사람 어머니 사이의 혼혈이다. 17세기 중엽에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에 의하여 형성된 마르티니크 섬에서 태어난 프란츠 파농 역시 그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학창 시절부터 파시즘에 저항하는 운동에 가담했던 파농은, 파시즘에 맞서기 위하여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연대해야 한다고 순진하게 믿었으나 바로 그 저항 세력 내부에서 인종 갈등을 겪게 된다. 먼 옛날의 흑인 노예를 조상으로 둔 프란츠 파농은 새로운 공부 길을 찾아 23살 때 프랑스 리옹의대로 유학을 떠난다. 이 대학에서 정신과 과정을 마친 파농은 생탈방 토스켈의 병원에서 연구 작업을 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프란츠 파농은 아프리카 환자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북아프리카 신드롬>이란 책을 쓴다. 이 책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인종차별의 상황이 어떻게 그들의 내면을 억압하는가 하는 그의 첫 번째 기록이다. 1953년에는 파농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을 쓰게 된다. 이 책은 원래 이태 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것이었으나 그 합당한 대가를 받지는 못했다. 박사 학위와 정신과 의사 자격을 얻은 프란츠 파농은 고향 마르티니크로 가려고 했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거쳐 알제리 블리다 주뱅빌 병원에 취직하게 된다. 마르티니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고 세네갈은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전 때 프랑스와 맞붙었던 관계로 '식민지 시절의 복수' 같은 성마른 기사들이 있었으며 알제리는 1950년대 후반에 프랑스로부터 독립 전쟁을 치른 나라다. 파농은 프랑스라는 중심 바깥의 주변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알제리에서 파농은 소수의 유럽 백인들이 압도적 다수인 알제리 아랍인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이 소수에 의한 다수의 피지배 상황이 가능해진 제국의 원리에 더하여 오랜 피지배의 상황에 의하여 그 많은 알제리 무슬림의 내면 세계가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가를 또한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청소년 시절에 파시즘 저항운동에 가담했을 정도로 가슴이 뜨거웠던 프란츠 파농이 정신의학이라는 지식으로 알제리 환자들을 냉철하게 살펴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지적 성찰이었다. 그는 훈계가 아니라 대화를, 강요가 아니라 자율을, 억압이 아니라 자유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환자를 대했고 이 방식은 금세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이 되었다. 독립을 원하는 알제리 사람들의 바람은 민중 봉기로 번져갔고 민족해방전선(FLN)이 주도하는 무장 투쟁까지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마틴 루터 킹이나 넬슨 만델라 같은 흑인 변호사들이 법률 조언으로는 한계를 느끼고는 대중운동에 가담했던 것처럼 프란츠 파농도 정신과 진료실이 하나의 운동 구심점이 되는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격렬한 저항과 삼엄한 진압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프란츠 파농이 재직했던 블리다 병원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로부터 추방 당한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파농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식민지 알제리에서는 연일 체포, 고문, 사망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제국의 저항적 지식인들은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프란츠 파농은 강한 프랑스를 주창하는 드골 시대의 파리와 결별하였다. 이제 파농은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저항 운동가였다. 유럽에 그 뿌리를 둔 정치학, 철학, 의학 같은 제국 학문의 체계에서 벗어나 튀니스를 거점으로 한 저항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알제리를 떠나온 민족해방전선(FLN)의 많은 운동가들은 튀니스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파농은 1957년 3월에 합류하였으며 그해 6월에는 민족해방전선(FLN) 대변인이 되었다. 강한 프랑스를 내세운 드골이 1959년에 대통령이 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드골은 양동 작전을 썼다.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는 동시에 프랑스군 총사련관 모리스 샬레를 통하여 치밀한 탄압 작전을 벌여 나갔다. 그 직전인 1958년 12월, 범아프리카회의에 알제리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한 파농은 프랑스 새 정부의 이 양면성을 정확히 진단하면서 아프리카 식민지의 공동 전선을 호소하였다. 파농은 드골의 유화 정책을 '약한 고리'로 여겨 그 틈새를 확실히 벌여놓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공동 전선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프란츠 파농은 이른바 '사하라 횡단 전선'을 구상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는 북아프리카 일대(지네딘 지단의 부모가 알제리 출신이고 티에리 앙리 또한 모로코계 출신이다)의 혈맥을 끊기 위하여 파농은 기니와 말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사하라 남부 일대에 연대의 발판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것을 위하여 사전 답사를 떠났으나 정찰대 전체가 숱한 곤란을 겪었고 프란츠 파농 역시 중병을 얻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제야 프란츠 파농은 자신이 골수성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최후의 호소문이 되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집필하고는 1961년 12월 6일에 사망하였다. 알제리는 1962년 7월 3일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펌 장윤수의 Booking 프란츠 파농이 사망하기 직전인 1961년에 출간된 이 책에는 장 폴 사트르트의 서문이 실려있다. 서문에서 사르트르는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파농을 통해서였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책은 탈식민 운동과 그 이론의 맨 앞에 기록되는 책이다. 식민이 단순한 영토 지배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상의 지배까지 포함되듯이 탈식민 역시 수많은 영역의 담론으로 심화되는 중요한 키워드다. 탈식민 운동이나 이론은 프란츠 파농 이후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가야트리 스피박 등으로 이어졌거니와 그 출발선상의 이 책은 이론의 측면에서나 탈식민을 향한 지식인의 열정이라는 측면에서 귀한 저작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