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 66. 신라의 반가사유상, 그리고 로뎅의 생각하는 남자
kr·@yangmok701·
0.000 HBD인문학으로의 초대 - 66. 신라의 반가사유상, 그리고 로뎅의 생각하는 남자
<html> <p><img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xNzA4MjdfMzQg/MDAxNTAzODI5NjU5Mjg4.U3rfGA7vRm1x4fgGcB89BSSxSOd6yGnvD35YBmrMds8g.ABLfbsaUssCpZ4ARyt8gwNpA-KFjrQ5odCO17inqB8wg.JPEG.pkh2432419/%EB%8C%80%EB%AC%B8%EC%9D%B4%EB%AF%B8%EC%A7%80.jpg?type=w2"/></p> <p>신라시대의 '반가사유상'과 19세기 프랑스의 조각가 로뎅이 만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조각예술품이지만,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대칭적 관계이다. 두 작품 모두 깊게 사유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깊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될 때에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고개를 약간 숙인채로 한쪽 손을 턱에 괴거나 하는 동작으로 있게 된다. 이러한 모습이 '반가사유상'과 '생각하는 사람' 두 작품 모두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p> <p>먼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파악해보자. 로뎅이 생각하는 사람을 제작하게 되었을 때에,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편을 연상했다고 한다. 마치 위에서 지옥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있는 건데, 지옥을 내려다보는 사나이의 모습이 결코 밝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로뎅이 신곡의 지옥편을 연상하면서 근육질의 남자를 조각하게 된 것은, 그 당스 프랑스의 시대적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 로뎅은 '생각하는 남자' 를 만들기 전에, 사회주의적 정치노선을 가진 정치인들과 친분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프랑스 사회의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단면을 어떻게 하면 혁명적인 노선으로서 바로 잡을까를 고민하는 사상이 다분했다고 한다. 그래서 로뎅이 생각하는 남자를 만들때에, 마치 지옥과 같은 프랑스 사회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어떻게 하면 프랑스의 민중들을 구해낼까를 고심하는 듯한 강한 혁명적 투사형의 근육질을 조각해내었던 것이다. </p> <p><img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xODAxMzBfMTc2/MDAxNTE3MjgwMDkzOTQ3._lADQOT9038qLpuXvlxpDXL92Vajr8MHORccV-1vTvog.numGT_lsESFxHjLb-ngaU-QoB3i_J-z97mCewrBH1BIg.JPEG.pkh2432419/%EB%A1%9C%EB%8E%85.jpg?type=w773"/></p> <p>반면에 신라시대에 제작되었던 '반가사유상'은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뇌하는 듯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 얼굴의 미소와 온화한 기운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차이점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반가사유상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미소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좋고 나쁜것을 구분지어서 좋은 것을 얻거나 외부의 대상으로 부터의 자극이 있어서 좋아 보이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 내면의 깊숙히 잠재되어져 있던 아주 진한 본성을 알아차리고 나서 얻을 수 있는 환희의 기쁨과 같은 미소이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던중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환희와 열정을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도대체 이 뜨거움이 올라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밝고 환해짐은 무엇인가? " 라고 자신에게 되묻고 있는 듯한 옅은 미소인 것이다. </p> <p><img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xODAxMzBfNzkg/MDAxNTE3MjgwMTAxOTkw.ef5lrdtJpZ_JuOK9YDNJwC1QWW0cRlQIesPsSnAALd8g.HC5pJuMVHXCW3geKGXx18HNUBeY0qsePQ40lmfP9paUg.JPEG.pkh2432419/%EB%B0%98%EA%B0%80%EC%82%AC%EC%9C%A0%EC%83%81.jpg?type=w773"/></p> <p>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꿈꿀 수 있는, 그러한 이론으로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설계도를 작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설계도에는 형이하학적이거나 혹은 형이상학적이든지, 그것을 통해서 소유하려는 욕망을 투사시켜서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세상의 변혁은 이분법적인 기준잣대로서의 사상과 이념의 논리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점으로 마음의 방향을 선회시켰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p> <p>존재론적인 마음의 상태라는 것은, 인간이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면서 그것을 얻기위해서 세상을 지배하고 간섭하려는 소유하고픈 의지를 포기하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세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다 긍정하면서 세상에 널리 이득되는 것을 펼쳐 보내주려고 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그래서 소유론적 욕망은 취득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욕망이라고 한다면, 존재론적 욕망은 세상에 더 주려고 하는 욕망인 것이다. </p> <p>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소유론적 욕망을 투영시킨 한 인간의 고뇌하는 모습을 담아낸 조각작품이라고 한다면, 신라시대의 미륵반가사유상은 존재론적 욕망을 투영시킨 어느 경지에 올라선 선인의 모습이며, 그 선인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해줘야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고뇌하는 모습을 담아낸 조각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이 훨씬 더 발전적이고 차원이 높은 수준의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다.</p> <p><br></p> </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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