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나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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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투가 불러온 비극의 관나부인 다처제 사회에서 투기죄로 수장되다 관나부인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으며, 출신 부의 이름을 앞에 붙여 편의적으로 부르고 있다. 고구려 5부의 하나인 관나부 출신이며, 부모나 형제 관계는 알 수 없다. 고구려 제12대 중천왕의 총애를 받아 소후(小后)의 물망에 올랐으나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가죽 부대에 넣어져 바다에 수장되었다. 태어난 시기는 알 수 없고 251년(중천왕 4년)에 사망했다.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는 장발(長髮) 미인이다. 중천왕이 소후로 삼으려 하였으나 왕후인 연씨(椽氏)와 사랑을 놓고 다투다 죽임을 당하였다. 왕후 연씨는 위(魏)나라가 장발을 좋아한다며 위나라 왕에게 바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왕은 왕후의 속셈을 알고 대답하지 않았으나 목숨의 위협을 느낀 관나부인은 중천왕에게 왕후가 왕이 없는 틈을 타서 자신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면 반격하였다. 251년(중천왕 4) 중천왕이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자, 관나부인은 가죽 주머니를 들고 왕후가 자신을 바다에 던져 죽이려 한다고 고하였다. 그러나 중천왕은 관나부인이 왕후를 모함한 것이라고 여겨,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했다. 각저총 묘주부부도에는 한 명의 남편과 두 명의 부인이 보인다. 이로써 고구려에서 일부다처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선주 저자 제공) 중국 문헌자료인 ‘삼국지’에는 부여의 풍습을 소개하는 부분에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여자가 투기하면 모두 죽였는데, 투기를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도 시체를 매장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고구려는 부여와 언어, 풍속 등 여러 면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에서도 부인의 질투에 대한 규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관나부인의 사례는 고구려에서 투기로 인해 처벌된 실제 사례로 주목되었다. 투기에 대한 처벌 규정은 당시 부여와 고구려 사회에서 일부다처제가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유리왕 때 화희와 치희의 사례나, 대무신왕 시절 원비와 차비에 대한 용어 등에서 고구려에서 다처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비도 투기를 하였지만 관나부인만 처벌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관노부가 왕비의 출신인 연나부에 비해 세력이 약했기 때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연나부는 명림답부의 쿠데타 이후로 고구려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고국천왕 이후 지속적으로 왕비를 배출하였으며, 중천왕대에도 연나부 출신으로 여겨지는 명림어수가 254년(중천왕 7년)까지 국상으로 있었다. 255년(중천왕 8년)에는 공주를 연나부 출신 명림홀도에게 시집보낼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천왕이 연노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힘없는 관나부 출신을 희생시켰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관나부인은 강력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연나부 출신 왕후와의 권력 싸움에 밀려 투기죄의 명목으로 시체도 찾지 못하게 수장된 것이다. 티브이ㆍ천일야화에서도 다루었습니다 또 다른 관나부인의 자료 얼굴이 곱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자나 되었다!!!! 왕의 총애를 받자, 연나부 출신 왕후 연씨의 시기를 받아 중국에 팔려갈 뻔 한다~ 왕후 연씨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한 관나부인은 사냥을 마치고 온 왕에게 가죽주머니를 보이며, 왕후가 자신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해하려 하니 목숨을 살려 집으로 보내달라 청한다. 하지만, 거짓말임을 안 중천왕에 의해 자신이 들고 온 가죽주머니에 넣어져 서해에 던져졌다. 중천왕 4년(251) 여름 4월에 왕은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져버렸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곱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어, 왕이 총애하여 장차 소후(小后)로 삼으려고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녀가 사랑을 독차지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서위(西魏)에서 긴 머리카락을 구하여 천금을 주고 사려고 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선왕께서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서 침입을 받고 달아나 사직을 거의 잃을 뻔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일개 심부름꾼을 보내 장발미인을 바치면, 그들이 반드시 흔쾌히 받고 다시 침략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 뜻을 알고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왕후가 자기에게 해를 가할 것을 염려하여 거꾸로 왕에게 왕후를 참소하였다. “왕후가 항상 저를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농사짓는 집[田舍] 여자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생각컨대, 왕후가 대왕께서 나간 틈을 엿보아 제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훗날 왕이 기구(箕丘)로 사냥 나갔다가 돌아오니, 부인이 가죽주머니를 들고 왕을 맞이하여 울면서 말하였다. “왕후가 저를 이 속에 담아 바다에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저의 작은 목숨을 살려 주시어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어찌 감히 다시 곁에서 모실 것을 바라겠습니까?” 이에 대해 왕은 주위에 물어보고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그리고 관나부인에게 “네가 꼭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겠느냐?” 고 말하고는 사람을 시켜 던져버렸다. 출전 :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왕후 연씨와 관나부인의 이야기를 연나부와 관나부의 권력다툼으로 보기도 하고, 관나부인의 투기가 심했다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의 기록만 보면 투기가 심한 건 왕후 연씨다~